본문 바로가기

거품없이 손 씻기

2021. 12. 29.

애플워치를 착용하고 손을 씻을 때, 손을 오래 씻을 수 있도록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20초가 지나면 깨끗해졌다는 메시지가 뜬다.
처음 이 기능이 나왔을 때의 이미지는 아래와 같았다.

이렇게 멋진 애니메이션과 함께 거품같은 서체 이미지를 기다리는 동안 손씻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멘트가 랜덤하게 나왔다.

이 기능이 대단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귀찮을 때도 많음)
이게 애플워치의 킬러기능도 아니지만 저렇게 텍스트 하나도 많이 신경쓴 모습이 정말 좋았다.

그렇게 저 기능이 업데이트 되고 몇 달 지났을까..
갑자기 텍스트가 아래와 같이 나왔다.

뭔가 오류가 있겠지 생각하며 재부팅도 해보고,
버그가 있나보다..하며 OS업데이트 되면 수정되겠지 했는데

1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손 씻기 완료 알림은 저렇게 텍스트만 나온다.

 

아...

 

왜 좋은 것이 없어졌을까?

거품이미지의 텍스트는 잘 보이지 않아서 없앴을까?
아니면 한글만 저렇게 출력되고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는 아직도 거품텍스트로 잘 나오진 않을까?
이건 버그인데 고치지 않는 것일까, 아무도 이것에 대헤서 리포트 하지 않는가? 불만이 없는가?

손 씻을때 마다 저 건조한 텍스트를 보며 손을 닦는다.

 

 

댓글

외로움

2021. 5. 8.

나는 크게 외롭다고 느낀적이 한번 있다.
폴란드 바르샤바였나.. 혼자 여행을 했을 때인데, 커피를 마시고 담배피우며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너무 외로워서 들고 다니던 수첩에 너무 외롭다고 그림과 글을 쓴 적이 있다.
잠시 느낀 감정이었겠지만 그 메모 덕분에 오래 기억에 남은 것 같다.
그만큼 나는 별로 외로운 느낌을 잘 받지 못한다.
아마 그런 감정은 자주 느꼈겠지만 내가 무뎌서 그냥 지나가거나 금방 잊어버리는 것 같다.

바로 이 장소였다.

근본적으로 나는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에 대해 지나치게 눈치를 본다.
할 말을 못하는 편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잘 하지도 못한다.
아직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서툴다.
그래서 아예 만남을 피하려고 한다.

특히 뭔가를 받는 것이 어색하다.
어색한 것을 넘어서 불편하다.
심지어 미용실에 가서 나는 앉아있고 미용사가 내 머리를 잘라주는 그 20분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 달라는 말도 잘 못하고, 대충 빨리 끝내고 이 자리를 일어나서 나가는 순간만 생각한다.
내가 수동적으로 서비스를 받는 그 순간이 어색하고 불편하다.하지만 나는 관심종자다.
사회적인 관계를 회의적으로 보면서 지나치게 민감하게 행동하는 것과 모순되는 행동을 늘 하고 있다.
20년도 더 전부터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으며 10년 넘은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사진과 글을 올렸고
싸이월드부터 블로그, 페이스북 어디든 공개적인 곳에 글이나 사진, 그림을 올렸다.
사람들이 나에게 신경쓰지 않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아무도 관심없는 곳에 혼자 떠들고 있었다.
분명 누가 봐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내 수첩에 쓰지 않고 공개적으로 뭔가를 남겨온 것이다.
대단한 관종 나셨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만나고 싶은 친구,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도 있으며
초등학교 동창들의 단체 카톡방에서 대화도 가끔한다.
어쩌면 외롭지 않을만큼 충분히 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내가 외로움을 잘 모른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외로움을 모른다면 그냥 외롭지 않다는 것이지, 외로우면서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데.

어쩌면 나는 약간의 관계만으로 외로움이 채워지기 때문에 외롭지 않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2003년 8월 30일 바르샤바

댓글

옛날 옛적, 할리우드의 타란티노

2021. 3. 29.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포일러 (거의)없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헐리우드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보여준다.
그가 사랑하는 헐리우드에서 실제 일어난 가장 끔찍한 사건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이며
동시에 본인이 하고 싶은 잔인한 폭력묘사에 대해 정당한 변명으로 죄책감을 지운 영화다.

실제 일어난 끔찍한 역사에 대해 대체역사로 보여주는 복수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
히틀러가 자살이 아닌 방식으로 죽음으로서 먼저 보여줬다.
그리고 [데쓰 프루프]에서 쓰레기같은 악당이 처참하게 응징당하는 장면으로 
끔찍한 폭력묘사가 부정적이거나 죄책감들지 않게 보여준 적이 있다.

사람의 얼굴이 뭉개지고 칼과 총으로 신체가 절단되며 불에 불타는 끔찍한 장면을
그 장면을 보는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면 이상한 사람이 될 정도로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영화의 중후반까지 꾸준하게 빌드업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영화도 참 좋아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가 아니라도 몇 개 생각나는게 있다면,
[라라랜드]와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영화를 꼽고 싶다.
폭력적인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 영화 다 특정 장면을 위해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쌓아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터트리는 것 처럼 느껴졌다.

[라라랜드]에서는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영화 초반에 그냥 스쳐지나던 그 순간을
후반부에 다시 재연하면서 초반의 영상과 다른 장면이 나오는데,
그 순간이 [라라랜드]의 가장 하이라이트 장면이라 생각되며 영화를 보며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역시 가장 마지막 장면을 위해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소비하며 빌드업하는데,
그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의 절박한 심정을 크게 공감하게 만든다.

포스터와 달리 행복은 찾기 힘든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를 만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이런 영화들은 그 이유가 명확하게 보여서 좋다.
어떤 멋진 순간, 그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PS.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블루레이에는 한국어 더빙이 들어있다.
이렇게 한국어 더빙이 들어간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타란티노는 정말 발페티쉬가 있는게 확실하다.
의심만 하다가 [데쓰 프루프]를 처음 볼 때 확신했던 장면이 있는데 잔인한 장면이라 올리기는 좀 그렇고.

[데쓰 프루프]의 한 장면

위 장면이 유명한지 타란티노의 발페티쉬 검색하니 나오는 이미지로 대신함.
아무튼 이후에도 늘 여성의 맨발을 크게 강조하는 씬이 자주 나온다. ㅎㅎㅎ

암튼 멋진형이야.

댓글

청춘의 파수꾼

2021. 2. 16.

 

영화 파수꾼을 보고 마주한 내 청춘.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누가 물어보면 (누가 물어본 적 없었지만) 대답할 책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아마 영화 파수꾼도 [호밀밭의 파수꾼]과 상관이 있는 제목인 것 같다.

10대 시절의 나는 어땠는지 구체적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내가 힘들어하고 기뻐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가장 지키고 싶었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선명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 때의 나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고
지금 보면 하찮아 보이는 것도 당시의 나는 큰 의미가 있었으며 인생의 큰 파도가 되기도 했고 기쁨이기도 했다.
모든게 서툴렀던 10대의 나는 상처주는 말을 쉽게 내뱉고, 나 역시 상처받기 쉬웠으며
항상 까불고 장난쳤지만 나름 모든게 진지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영화 파수꾼을 보면서 나는 잊고 있었던 고등학생의 나를 마주했다.
모든 것이 미성숙했던 10대의 나와 주변의 관계에 대해.. 잊혀졌던 그 느낌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의 나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긴 나는 20대, 30대에도 내가 어리고 미성숙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약 비슷한 생각을 했더라도 그냥 껍데기만 그랬을 뿐, 스스로를 세상 다 아는 늙은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수룩한 것이 당연한 10대지만
내가 상처받고 상처주는 모든 일들이 세상의 전부였고, 그 작은 경계의 바깥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잊고 살았던 그 느낌을 영화 파수꾼을 통해서 다시 느꼈다.

내가 더 나이가 들기전에 봐서 다행인 걸까,
아니면 앞으로 40년이 지나도 이런 영화를 보면 10대 시절의 그 느낌을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어린 나이에는 철없이 그것을 즐겼어야 했나..라는 생각도 든다.
내 딴엔 힘들게 살면서 뭔가 해놓은 것도 딱히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살았다.

청춘 (靑春)
파란 새싹이 피는 봄

나는 청춘에 대한 영화라면 명암(明暗)의 구별없이 좋아한다.
내가 청춘이던 시절의 나는 청춘이 다 지난 사람처럼 살았다.
참 아쉽지만
그게 나의 청춘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직전의 나. ㅋㅋㅋ

댓글

홍대병

2020. 11. 17.

 

오늘의 이적을 있게 해준 노래, <달팽이>는 그때도 좋아했지만 지금 들어도 참 좋은 노래다.
나는 <달팽이>가 히트친 것은 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달팽이>의 가사는 뭔가 있어 보이게 시적이면서,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정도의 어려움이었고
듣기에 편하면서 많이 들어본 일반적인 대중가요 발라드와 구별되는 멜로디도 적당히 낯설면서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적당하게 어려운 듯하면서 너무 어렵지 않아서 적당히 마음에 드는 애매한 포지션의 음악이나 영화, 소설은
이를 접하는 사람들의 문화적인 허영심을 자극하여,
그것을 소비하는 것으로도 스스로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인 듯 착각하게 만들어 만족감을 주었다.
음악으로는 <달팽이>가 그랬고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타락천사>등이 그랬으며
<상실의 시대>, <댄스댄스댄스>등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그랬다.
적당하게 어려우면서 과하지 않은 재미를 주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채워주었던 것 같다.
<다이하드>, <투캅스>같은 영화나 <퇴마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같은 소설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보다

"왕가위 영화의 완성은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이 있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 원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은 어쩌면 노르웨이산 가구라는 뜻일 수 있다"

정도의 대사를 읇어줘야 아, 뭔가 아는 사람이구나..했던 것이다.
비슷한 영화로는 <세가지 색 블루>나 <천국의 아이들>이 있고 (감독 이름을 외우면 더 좋음)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일본 작가나 폴 오스터 같은 작가가 있다.
이런 영화나 소설은 누구에게 추천해도 대부분 재미있게 소비하게 된다.

나는 지적인 혀영심을 채우는 즐거움은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요즘은 홍대병이라는 이름으로 놀림 받기도 하지만 절대 비꼬는 것이 아니라,
이런 허영심으로 본인이 즐겁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을 보고 전율을 느끼는 것이나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나
문화를 소비하는 주체가 행복하다는 점에서 평등하게 같다고 생각한다.

내 기억에는 90년대 초중반이 그런 문화적인 허영심을 자극하는 컨텐츠가 많았던 기억으로 있지만
그 시절에 10대와 20대를 보낸 내 기억 때문일 것이다. 
진지한 담론으로 독자의 허영심을 채워준 <sub>, <KINO>같은 메이져 잡지와 
계간 <REVIEW>나 <팬진공> 같은 독립 잡지를 기억하며,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홍익미대 졸업생들의 포트폴리오 같았던- 그 외 많은 독립 잡지들을 기억하고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