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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병

2020. 11. 17.

 

오늘의 이적을 있게 해준 노래, <달팽이>는 그때도 좋아했지만 지금 들어도 참 좋은 노래다.
나는 <달팽이>가 히트친 것은 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달팽이>의 가사는 뭔가 있어 보이게 시적이면서,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정도의 어려움이었고
듣기에 편하면서 많이 들어본 일반적인 대중가요 발라드와 구별되는 멜로디도 적당히 낯설면서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적당하게 어려운 듯하면서 너무 어렵지 않아서 적당히 마음에 드는 애매한 포지션의 음악이나 영화, 소설은
이를 접하는 사람들의 문화적인 허영심을 자극하여,
그것을 소비하는 것으로도 스스로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인 듯 착각하게 만들어 만족감을 주었다.
음악으로는 <달팽이>가 그랬고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타락천사>등이 그랬으며
<상실의 시대>, <댄스댄스댄스>등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그랬다.
적당하게 어려우면서 과하지 않은 재미를 주면서 지적인 허영심을 채워주었던 것 같다.
<다이하드>, <투캅스>같은 영화나 <퇴마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같은 소설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보다

"왕가위 영화의 완성은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이 있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 원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은 어쩌면 노르웨이산 가구라는 뜻일 수 있다"

정도의 대사를 읇어줘야 아, 뭔가 아는 사람이구나..했던 것이다.
비슷한 영화로는 <세가지 색 블루>나 <천국의 아이들>이 있고 (감독 이름을 외우면 더 좋음)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일본 작가나 폴 오스터 같은 작가가 있다.
이런 영화나 소설은 누구에게 추천해도 대부분 재미있게 소비하게 된다.

나는 지적인 혀영심을 채우는 즐거움은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요즘은 홍대병이라는 이름으로 놀림 받기도 하지만 절대 비꼬는 것이 아니라,
이런 허영심으로 본인이 즐겁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을 보고 전율을 느끼는 것이나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나
문화를 소비하는 주체가 행복하다는 점에서 평등하게 같다고 생각한다.

내 기억에는 90년대 초중반이 그런 문화적인 허영심을 자극하는 컨텐츠가 많았던 기억으로 있지만
그 시절에 10대와 20대를 보낸 내 기억 때문일 것이다. 
진지한 담론으로 독자의 허영심을 채워준 <sub>, <KINO>같은 메이져 잡지와 
계간 <REVIEW>나 <팬진공> 같은 독립 잡지를 기억하며,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홍익미대 졸업생들의 포트폴리오 같았던- 그 외 많은 독립 잡지들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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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잉 넛 25주년 기념앨범

2020. 8. 27.

크라잉 넛이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베스트 앨범을 새로 냈다.
기존에 있던 곡들을 그대로 짜깁기한 앨범은 아니라 다시 부르고 녹음한 앨범인데
8집까지 나온 정식앨범의 커버를 새로 그리기도 하고 꽤나 정성들여 만들었다.

멤버들 사인반으로 받았다!!



밴드 [크라잉 넛]을 알게된 건 1996년이었나..
아워 네이션(Our Nation) 이라는 이름으로 옐로우 키친이라는 밴드와 만든 앨범부터 접했다.
(테이프로 A사이드는 크라잉 넛, B사이드는 옐로우 키친이었는데 옐로우키친의 음악도 참 좋다.)
암튼 거기 실려있던 ‘말달리자’가 메가히트 치면서 크라잉넛이 전국구로 유명해졌는데,
개인적으로는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는 별로 안 좋아했다.
너무 자주 들어서 지겹다. 노래방에서도 정말 많이 불렀다.
당시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크라잉넛 공연도 여러번 갔고
심지어 무대위에 올라가 헤드뱅잉도 같이하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제대로 놀았다는 뿌듯함을 느낄 정도로 신나는 공연이었다.

내가 크라잉넛을 좋아하는 이유는 말달리자 같은 정신없는 곡들도 좋지만
앨범의 가장 마지막 곡 혹은 뒷쪽에 있는, 이상하게 우울한 곡들이 참 좋아서였다.
그냥 우울한 곡이 아닌 이상하게 우울한 곡이라는 것이, 가사나 멜로디는 뭔가 우울한데
어딘가 모르게 그루브하고 마냥 어둡지만 않고 밝은 부분이 느껴지는 그런 우울함이다.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는데 어깨가 들썩거리는. 울어서 그런게 아니라 박자를 타고 있다고 할까.

오래전에 한국 인디밴드들이 Nirvana 트리뷰트 앨범을 냈는데 그 앨범 첫곡이 크라잉넛이 부른 곡이었다.
너바나 노래중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세상 우울한 곡인데, 무슨 다죽자 스타일의 신나는 펑크로 불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크라잉 넛의 25주년을 기념하여 내가 뽑은 그들의 베스트(우울한)곡은 아래와 같다.
곡의 순서는 발매순이다.

1. 검은새 (1집)
“오, 비가 오면 나는 좋아. 맑은 하늘 찢어버리고 / 나는 한마리의 검은새, 그대의 어깨위에 내려 앉아서 / 그댄 이미 한마리의 백조가 되어 있더군”
- 곡이 약 5분 30초 정도인데 후반 2분은 연주만 한다. 크라잉 넛 1집은 그야말로 90년대 펑크락밴드의 치기어린 데뷔앨범이었는데도 이런 곡이 있다.

2. 게릴라성 집중호우 (2집)
“또다른 한사람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네 / 또다른 두사람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네“
- 가사는 참 우울한데 따뜻한 연주와 술잔이 부딪히는 효과음이 너무 우울하게 만들지 않으며 웃음소리로 끝난다.

3. 양귀비 (3집)
“나의 지랄같은 염병할 인생에 / 삼라만상에 꼬이고 또 꼬였던 /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여름날 / 꽃이여 피거라, 꽃이여 피거라~!”
- 25주년 앨범에도 실려있어서 뺄까 했지만 좋아하는 노래라서 뺄 수가 없네.

4. 몰랐어 (3집)
“나 하나쯤은 빠져도 티나진 않을거야 / 내가 이럴줄은 내가 이럴 줄은..”
- 기타연주가 참 좋다. 배경에 깔리는 리듬기타도 좋은데 중간에 나오는 기타 솔로가 참 좋다. 연주만으로 눈물이 난다.

5. 개가 말하네 (4집)
“일어나 세상의 더러운 쓰레기는 니가 아냐 / 부족한 것은 없어 단지하나 그저 너에게 잘보이고 싶어 꼬리치네 “
- 25주년 앨범에도 있는데 ‘7년전에 시작되어’라는 가사가 ‘25년전에 시작되어’로 바뀌어있다. 크라잉넛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노래.

6. 귀뚜라미 별곡 (4집)
“창백한 작은 등에 돛을 달고 / 가지 말라고, 함께 가자고 / 귀뚜라미 춤추는 밤 / 이젠 나와 함께..”
-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사운드가 오른쪽과 왼쪽 스피커에 분리되어 들린다. 술을 부르는 노래.

7. 물 밑의 속삭임 (5집)
“저 별이 뜨고 내가 널 지켜줄게 / 메마른 발에 내가 널 끌어줄게 / 내 아련한 곳, 물 밑의 속삭임”
- 심수봉의 목소리가 정말 아름답다. 쿵짝짝 쿵짝짝 슬픈 뽕끼의 곡.

8. 튼튼이의 모험 (5집)
“고향의 꽃은 피었니 / 바다의 향기 좋았니 / 혼자서 비도 맞았니”
- 죽은 햄스터를 추모하는 곡이다. 동명의 영화도 개봉했는데 이 노래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9. Gold Rush (6집)
“밤은 별을 삼킨채 머리위로 떨어져 / 높아져가는 바다위로 솟는 태양 / 아래 눈멀은 두 눈엔 떨어지는 눈물 / 뜨거운 하늘 두 손엔 녹아버린 보물”
- 6집도 역시 가장 마지막곡은 잔잔하고 우울한 곡이다. 하지만 6집은 전반적으로 곡들이 가장 좋아서 이 곡이 더 뛰어나게 들리진 않는다.

7집과 8집엔 이런 조용한 노래가 없다. 그래서 많이 아쉽다.
앨범을 추천한다면 2집과 6집을 추천한다. 둘 다 신나는 노래가 가득하고 처음 들어도 딱 좋은 곡들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3집과 4집을 좋아한다. 앨범을 뒤돌아보면 매 앨범마다 히트곡들이 하나둘씩 있다는게 참 대단한 것 같다.
크라잉 넛과 함께 늙어가는 것이 좋다. 데뷔 50주년 앨범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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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음악사 - 1

2020. 8. 5.

1.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어린 학생이 가요를 듣고 부른다는 것은 마치 술이나 담배처럼 아이들이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때는 가끔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가 있는데, 동요나 만화주제곡이 아닌 가요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5학년 때, 모든것이 달라졌다.
이유는 기억 안나지만 선생님이 우리반 여자아이에게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고
그 아이는 앞에 나와서 이정석의 ‘사랑하기에’를 불렀다.

“사랑하기에 떠나야 한다는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사랑한다면 왜 헤어져야해.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그러고보니 우리는 TV를 자주 보고 있었고 뭘 들어도 바로 머릿속에 쏙 들어가던 나이였기에
어지간히 유행하는 가요는 대부분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나도 평소 음악을 듣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저 노래가 누구의 노래인지, 어떻게 부르는지는 알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이 뭔지, 헤어지는 것이 뭔지, 연애의 개념도 몰랐지만, 새삼 저 노래의 멜로디가 너무 좋았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민주화운동이 한참이던 시절.

2.
나는 초량동의 비잔틴 미술학원이라는 곳을 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국민학생이 다니는 일반적인 미술학원이 아니라 입시미술을 가르치는 학원이었고
미대를 다니는 대학생 강사에게 석고상 뎃생과 수채화를 배웠다.
시위가 한참이던 여름의 비잔틴 미술학원은 미대생이 판화로 만드는 프로파간다 찌라시를 찍는 곳이었다.
깃발을 들고 주먹을 들고 있는 학생들의 그림을 판화로 찍어내던 곳.
그리고 강사 선생님들이 점점 미술학원에 나오지 않았고 나는 혼자 나와서 혼자 그림을 그리곤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비잔틴 미술학원은 강사는 없어도 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나오지 않게 되었던 미대 형님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던 것일까?)
그곳은 작은 카세트플레이어로 항상 이문세 3집과 4집이 항상 플레이되고 있었다.
다른 노래는 없었고 계속 이문세 노래만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문세 노래를 다 따라부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가수는 이문세였다.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걸..”


3.
이렇게 1과 2의 이유로 가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나만 그랬던게 아니었는지 6학년이 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국민학생들이 가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원래 국민학생들도 다 가요를 듣고 있었는데 내가 몰랐다가 알게되면서 동참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문세는 5집이 나왔고 나는 ‘붉은노을’을 흥얼거리며 국민학교를 다녔다.

1988년 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테이프를 사기 위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집 앞 상가의 비디오가게 한구석에서 음악테이프를 팔았는데, 매일 거기 들러서 30분씩 테이프를 고르면서 고민하며 돈을 모았다.
가요 테이프 가격은 2800원 이었는데 이문세 5집은 3500원으로 올라서 논란이 있었다.
나는 3000원을 모아서 처음으로 살 테이프를 한달도 넘게 골랐는데 후보를 추리고 또 추렸다.
내 첫 테이프 구입의 영광을 가져갈 아티스트 후보.

하나는 소방차에서 솔로로 데뷔앨범을 낸 이상원의 앨범이었다.
이상원의 탄생이라는 곡이 인기였는데 나는 그 노래를 좋아했다.

“탄생! 우리는 젊음으로, 탄생! 우리는 희망으로, 탄생! 우리는 사랑으로, 여기! 새롭게 태어났네! 이대로 영원히 영원히”

그리고 나머지 후보는 대망의 무한궤도 앨범이었다.
무한궤도는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에 빛나는 ‘그대에게’는 듣는 순간 1988년의 내 머리를 날려 버렸다.
아마 누구나 다 그랬을 것 같다.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키보드 전주는 정말 대단했다.
강변가요제의 담다디도 대단했지만 대학가요제의 그대에게는 충격적으로 좋았다.
그 무한궤도가 데뷔앨범이 나왔는데, 그 앨범의 트랙리스트에는 '그대에게'가 없었다.
그것이 실망스러웠지만 무한궤도는 이름도 멋지지 않은가. 무한의 궤도라니... 분명 좋은 노래가 많을 것 같았다.

이상원과 무한궤도. 나는 두 앨범을 두고 깊이 고민했으며
나는 무한궤도의 테이프를 2800원에 사서 집에 들어왔다.
내 인생의 가장 잘한 구매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이 선택이다.


1989년 1년 내내 나는 이 테이프 하나만 들었다. 다른 테이프 살 여력도 없었지만 무한궤도는 정말 미친듯이 좋았다.
모든 곡이 다 좋았고 대중적인 발라드부터 신나는 템포의 곡, 그리고 실험적인 곡까지 뭐하나 뺄게 없었다.

“흐르는 시간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무한궤도에서 신해철이 독립하고 나머지는 공일오비가 되면서 넥스트부터 윤종신, 유희열까지...
지금까지도 1989년 무한궤도에서 계보가 이어지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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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22.

내가 개인 홈페이지를 처음 만들어 본 것이 97년인가 98년인가 그랬다.

하이홈이라는 업체에 가입하여 무료로 만들 수 있는 홈페이지 하나를 만들었다.

당시엔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유행이었는데 나는 책만 보고 익히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다가 포토샵으로 gif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법을 터득한 후에

나모웹에디터를 이용해서 마치 플래시애니메이션인 것 처럼 흉내내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색이 변하는 직사각형의 타일을 gif 파일로 만들어서 표형식으로 배치하여

마우스 오버롤 기능을 넣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이때 만든 홈페이지는 2005년에 하이홈이 경영난으로 무료서비스를 종료하고 곧 문을 닫으면서

나의 첫번째 홈페이지도 문을 닫았다.

그때 내가 썼던 글들은 다 백업을 해서 지금도 하드에 저장되어 있긴 하지만

다시보면 너무 부끄러운 내용이 많아서 나도 끝까지 읽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글을 자주 올렸다.

네이버 메인에 등록되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간단하게 교류하기도 하는 등. 꽤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도메인을 등록하고 호스팅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고 큰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2010년 나는 드디어 내 도메인을 가지고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제로보드라는 것도 설치해서 게시판도 만들어보고 내 포트폴리오를 올려서 구직에 이용하기도 했다.

블로그처럼 열심히 포스팅 할 거라 생각했지만.. 하이홈과 블로그에서 많은 글을 썼던 것과 달리 그냥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나도 관리를 안 하니 트래픽에 민폐를 끼치는 byte낭비도 아니고 그냥 버려진 곳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홈페이지를 만들고 꾸미고 내 컨텐츠를 올리고 교류하는 등의 여유가 없는 시기가 되었다.

그래도 도메인과 호스팅은 계속 연장했으며 틈틈히 내가 가장 원하던 도메인이 사용가능하게 되었는지 체크를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계속 새로운 플랫폼을 찾았다.

네이버에 새로운 블로그도 만들어보고 기존의 블로그도 싹 바꿔보고

이글루나 텀블러에도 글을 올려보고 지금 이 티스토리에도 테스트 삼아 글과 사진을 올렸다.

여러 스킨을 적용시켜보고 편집하고, 내 홈페이지에 한 프레임으로 넣어보기도 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러다가 몇 달 전에. 드디어 내가 가장 원하던 도메인을 구입할 수 있게 되어서 냉큼 구입했다.

어떤 회사가 쓰고 있던 도메인이라 내가 가져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그 회사는 망했거나 실수로 도메인을 놓쳤던 것일까?

 

아무튼 그렇게 나는 dkm.kr 도메인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에 맞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싶었다.

이제는 모바일로 접속해도 보기 편해야 하며 관리하기 쉽게.

내 능력으로는 어렵고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수준에서 만든다고 쳐도 

컨텐츠를 올리고 관리하는 것은 결국 다른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결국 (일단은) 2008년 쯤에 만들었다가 방치되어 있던 티스토리 블로그를 도메인과 연결하여 쓰기로 했다.

모바일에서 글이나 사진도 올리기도 쉽고, 하이홈처럼 갑자기 문 닫을 확율도 적은 곳에서.

이제는 한 곳에서 오래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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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악몽

2010. 7. 16.

산타 매장.











산타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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