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더운 여름이 언급되면 항상 나오는 1994년 여름.
내 기억의 1994년은 먼저 김일성의 죽음이 큰 화제였다.
거대한 돼지로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나에게 김일성이 죽든가 말든가 관심은 없고

비슷한 시기에 나온 더클래식1집, 마법의 성.
이 노래는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스타일의 노래였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지막에 여러 가수들이 떼창으로 부르는 버전을 좋아했다.
이승환, 오태호, 윤종신, 장필순, 유영석, 한동준이 같이 불렀는데
몇 년 후에 이소라, 김장훈, 조규찬, 조원선, 김형중 등이 더 합세해서 부른 버전이 있다.
이 곡에서 김장훈 부분 목소리가 묘하게 김흥국 목소리 같아서 좀 웃긴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이 94년 여름에 나왔다.
망미동 오르막길을 땡볕아래 걸으며 워크맨으로 방금 산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을 듣는데
노래도 너무 헤비한데, 너무 더웠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여름안에서 들어있는 듀스 2.5집이 나와서 테이프 늘어지도록 들었다.
내가 93년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이 H2O 3집 '오늘 나는' 이라는 앨범인데
듀스 앨범에 H2O가 피쳐링한 곡이 있어서, 역시 듀스는 뭘 좀 아는구나 하고
혼자 뿌듯해 했다.

넥스트 2집, 공일오비 5집도 94년에 나왔는데
무한궤도부터 같이 시작한 신해철과 정석원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공일오비 5집 속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넥스트 2집엔 속지는 마치 외국 메탈앨범처럼 음악 평론가의 평론 같은게 들어있는데
당연히 넥스트 앨범에 대한 좋은 평가의 글이었고
공일오비 5집의 속지엔 정석원의 글이 들어 있었는데 서두에
우리나라 모 밴드처럼 자화자찬하는 평론은 안 넣고 싶었다라고 시작한다. ㅎㅎ
어쨋거나 저쨋거나 두 앨범 다 정말 사랑하는 앨범이고
약간 더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넥스트 2집이다.
앨범 속지만 보면 공일오비 5집이 더 좋다. 정석원이 각 노래마다 어떻게 만들기 시작했고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악기를 썼는지 등 내용이 아주 재밌다.

94년이라고 하면 또 빠질 수 없는 전람회 1집.
신해철이 프로듀싱한 전람회 1집은 신해철의 애정이 막 묻어나서 좋아하는 앨범이다.
테이프로 들을때 A면의 모든곡이 전주없이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왜인지 모르지만 혼자 뿌듯해했다.
그리고 전람회의 김동율이 작곡하고 김현철 작사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이라는 노래도 뺄 수 없지.
장혜진 3집 마지막 곡이었는데, 당시엔 타이틀 곡도 아니었고
나도 타이틀곡이었던 '내게로'라는 노래가 좋아서 테이프를 구입했다가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 '1994년 어느 늦은 밤'이 되었다.
그때 나는 제목이 좀 마음에 안 들었는데, 노래만 들으면 굉장히 옛날이어야 멋진 제목인데
1994년이라는게 너무 지금이고 현대적이라 아쉽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보면 1994년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정말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멋진 제목이다.
김현철 작사, 편곡이지만 김동률의 느끼한 향이 더 진하게 나는 곡 같다.
수많은 가수들이 커버를 한.. 지금 들어도 세련된 명곡.
장혜진 3집 자체를 김현철이 프로듀스했는데 앨범 전체적으로도 물론 참 좋다.
그리고 여행스케치의 4집도 잊을 수 없지.
운명이라는 발라드가 히트를 쳤고. 산다는 건 그런게 아니겠니 라는 노래 들으면
역시 어른들의 이야기야.. 라고 생각했다.
아,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앨범은 공일오비 객원가수 출신의 김태우가 결성한
뮤턴트 라는 밴드의 앨범. '잔인한 너' 라는 곡이 약간 히트를 쳤는데, 나는 아주 좋아했다.
심지어 이 뮤턴트가 부산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서 혼자 예매하고 교복입은채 공연장에 갔다.
공연 포스터에는 게스트로 듀스가 나온다고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나오지 않았다. 하...

나중에 최민수라는 가수와 김태우가 '두 남자 이야기' 라는 앨범을 냈는데
여기에 '잔인한 너'의 통기타 버전이 들어있는데 이 버전도 꽤 좋음.

1994년이라면 김광석 4집도 뺄 수 없지.
생전 마지막 정규앨범이었고, 당연히 명곡이 많이 들어있는 명반이다.
서른 즈음에,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트랙리스트만 봐도 다 아는 노래들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당시엔 많이 듣지 못했고, 더 나이가 들어서 많이 들었기 때문에
1994년 기억으로 남기기엔 좀 어색하지만. 94년에 발매된 앨범이고 뺄 수는 없지.
이렇게 생각해보니 1994년에 좋은 앨범이 정말 많이 나왔구나.
1993년에 나온 낯선사람들, H2O3집 같은 앨범도 94년에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해외 앨범으로 치면 너바나 혹은 커트 코베인 이야기를 뺄 수 없겠지만, 해외 앨범은 빼는 걸로.